DNA로 내 조상 찾기 (National Geographic GENO 2.0 프로젝트)

필자는 조상을 찾기 위해서 거금 200달러를 투자해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의 ‘GENO 2.0’프로젝트에 참가했다. 필자의 유전자를 분석해 부계는 18만년 전부터, 모계는 15만년전부터, 그리고 6만년전 아프리카를 떠나서 현대의 한반도까지 필자의 조상이 어떻게 이동을 했는지 추적해봤다. 이 프로그램에는 주로 서구인들이 참가해서 아시아인의 DNA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아 다소 아쉬운 감이 있고 부계 유전자로 조상을 추적한다는 것은 과학적 정확성이 좀 떨어질 수도 있지만 큰 그림에서 필자의 조상들을 찾아보는 것은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필자와 같은 부계 유전자를 공유한 세계적 인물들. 몇 만년전부터 10만년전 사이 칭기즈칸, 링컨, 나폴레옹, 투탕카멘(파라오)이 필자와 직계 할아버지가 같다고 한다.
▲필자와 같은 부계 유전자를 공유한 세계적 인물들. 몇 만년전부터 10만년전 사이 칭기즈칸, 링컨, 나폴레옹, 투탕카멘(파라오)이 필자와 직계 할아버지가 같다고 한다.

6만5천년전부터 4만5천년전 사이에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막 나와서 중동, 서남아시아 정도에 머물 당시 필자의 직계 조상은 칭기즈칸,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뚜와네트, 미국의 영웅 벤자민 프랭클린 등의 직계조상이기도 했다. 4만5000년 전부터 2만5000년 전 사이에 인류가 동굴에서 사냥을 하면서 살 때를 기준으로 하면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 유럽의 정복자 나폴레옹과 필자는 같은 할아버지를 가지고 있었다. 동양인이 별로 많지 않아서 아쉽지만, 이렇게 보니 필자의 집안이 인류 역사를 뒤흔든 세계적으로 대단한 집안이 되어버렸다. 현재 살아있는 인류 200명 중의 한 명이 칭기즈칸 자손들이라고 하는데 이쪽 DNA가 좀 더 연구되면 필자와 칭기즈칸 황금부족과도 뭔가 혈연적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필자 할아버지들의 6만년 간 이주 경로와 2~3만년전 살았던 ‘P197’ 할아버지 후손들의 분포
▲필자 할아버지들의 6만년 간 이주 경로와 2~3만년전 살았던 ‘P197’ 할아버지 후손들의 분포

30만년 전부터 15만년 전 사이에 Y 염색체 ‘아담’이라고 불리는 남성은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10만년 전 즈음 ‘P305’라 불리는 남성은 인류의 99.9% 직계 부계 조상이다. ‘M168’이라는 남성은 현재의 에티오피아, 케냐 또는 탄자니아에 7만 년 전에 살았는데, 모든 비 아프리카계 남성의 공통 조상이다. 6만년 전 빙하기는 아프리카에 극심한 가뭄을 가져왔고, 그 다음 후손인 ‘P143’ 할아버지는 서아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어디쯤 살았다. 4만년 전부터 2만년 전까지 빙하기가 초래한 극심한 가뭄은 우리 조상들을 서남아에서 다른 신세계로 이주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4만년 전 내 할아버지들은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중동과 유럽에 살던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언스의 혼혈이 나왔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한 약 100만명의 DNA에는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1.3% 섞였다는데 필자는 1.4% 가 섞여 있었다.

4만년 전에서 2만8000년 전 사이에 동남아 어딘가 살았던 ‘P186’이라는 할아버지는 현재 인도 남성 23%의 조상이고, 한국 남성 70~82%, 일본 남성 47~65%, 중국 한족 남성 69~86%의 할아버지가 된다. ‘M122’ 할아버지 후손들은 구석기 시대에 살았는데 1만년 전 빙하시대가 끝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동아시아의 인구폭발을 야기했다. 그는 현대 한족의 57%, 폴리네시안의 32%의 조상이다. ‘P197’ 할아버지는 3만8000년 전부터 2만1000년 전 사이에 살았는데, 동아시아와 동남아에 골고루 후손을 뿌렸다. 아래 지도는 P197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어떻게 흩어져 사는지를 보여준다. 필자의 P197할아버지는 남중국에 후손을 많이 남겼다. 운남성, 소수민족 투자족, 나시족, 다이족, 장족 등에 P197 할아버지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다.

이번 프로젝트 결과는2~3만년 전까지의 기록만 나와서 약 6000년 전부터 발흥하기 시작한 초원 지대 유목민들과 필자의 DNA 상관관계를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필자가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 운남성 사람들과 DNA를 공유한 다는 것은 좀 낯설게 느껴진다.

▲밝게 웃는 몽골인 자매. 70년대 한국 시골의 소녀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몇 천년, 또는 1~2만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 소녀들과 필자가 같은 조상을 가졌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밝게 웃는 몽골인 자매. 70년대 한국 시골의 소녀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몇 천년, 또는 1~2만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 소녀들과 필자가 같은 조상을 가졌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National Geographic GENO 2.0 프로젝트는 서구인 중심으로 약 100만명이 참가했다. 앞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동양인들의 DNA가 더 수집되면 우리 한반도 주민들의 조상들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필자와 몽골, 중앙아시아 고대인들과 혈연 관계를 보다 자세히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가까운 시일내에 필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최근 2~3만년간 이동경로를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4000~5000년 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중앙아시아, 몽골 초원의 유목민과 필자와의 DNA 상관관계가 더 소상하게 파악될 것이라 기대한다.

지금의 남중국 사람들 상당수와 2~3만년 전에 같은 할아버지 아래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필자는 민족과 역사라는 개념을 다시 보게 되었다. 배달민족, 단일민족의 프레임은 멀리는 고려말 몽골의 침략 때부터 맹아적으로 나타나 식민지시대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의 자주독립시기에 형성되고 분단시대에 더욱 강조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혼혈과 잡종으로 새로운 상품과 아이디어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에 배타적 민족관은 인구절벽으로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 한국에 외국의 인재들이 들어오기를 꺼리게 만든다. 몽골제국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를 인정하는 관용의 가치였다. 한반도의 남쪽 구석 작은 땅 덩어리에서 부존자원없이 세계최고의 인구밀도로 살아가는 남한에서 세계를 향해 열린 개방과 관용의 가치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몽골의 기구한 지정학적 위치

▲자이슨 전승탑. 일제와 칼라쿨린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희생된 소련군의 희생을 추모하는 기념물로 소련의 지원 하에 1969년 건설을 시작해 1971년 완공했다. 당시 몽골군은 말, 러시아 군은 총과 탱크를 동원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자이슨 전승탑. 일제와 칼라쿨린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희생된 소련군의 희생을 추모하는 기념물로 소련의 지원 하에 1969년 건설을 시작해 1971년 완공했다. 당시 몽골군은 말, 러시아 군은 총과 탱크를 동원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800년 전, 13세기 몽골제국의 영광은 세계사와 인류의 삶을 뿌리째 흔들었다. 또 21세기를 살아가는 몽골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히려 근현대의 몽골인들에게는 몽골제국의 눈부신 번영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약 770년 전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는 몽골의 유럽 원정군를 지휘하여 러시아를 정복하고 킵차크칸국을 세워 240년간 지배하였다. 몽골족의 지배로 인해 러시아의 발전이 지체되었고 서유럽에 비해 후진국가가 되었다. 이것을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며 수백년 동안 치욕으로 여겼다. ‘타타르의 멍에’를 치욕으로 생각하는 러시아는 칭기즈칸을 지옥에서 기어 나온 대마왕으로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폄훼하고 흔적을 지웠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동진이 몽골제국을 계승해 유라시아 통합을 도모한 것이었고 칭기즈칸이 유라시아 연합의 초석을 놓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외몽골도 독립을 선언했지만 별로 인정해주는 나라들이 없었다. 독립은 추구했으나 자강에는 이르지 못한 절반의 성공이었다. 소련이 장제스가 이끌던 중화민국과 싸우던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외몽골의 독립을 보장해주면서 오늘날의 몽골이라는 나라가 탄생한다.

외몽골은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입김에서는 벗어났으나 소련은 몽골을 위성국화해 군사까지 주둔시키는 등 사실상 자국령으로 취급했고 지독한 내정 간섭을 했다. 소련은 러일전쟁, 2차 대전 때 몽골인들을 억지로 징병시켜 전쟁터로 내보냈고 내몽골과 외몽골을 합쳐 몽골 전체를 소련의 몽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병합 하려했는데, 그 과정에서 몽골의 민족문화, 유목적 생활방식을 강제로 변경시키려 했고 소련 치하에서는 티베트 불교와 몽골의 성씨까지도 씨가 말랐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는 최초의 몽골 우주인이 입었던 우주복이 전시돼 있다. 몽골은 1989년 러시아 로켓에 몽골인을 태워 몽골 최초의 우주인을 배출했다. 러시아와 몽골의 친선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 박사가 러시아 우주선으로 2008년에 처음으로 우주에 가봤으니, 우리보다 19년 빨리 몽골사람이 우주에 먼저 가 본 것이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는 최초의 몽골 우주인이 입었던 우주복이 전시돼 있다. 몽골은 1989년 러시아 로켓에 몽골인을 태워 몽골 최초의 우주인을 배출했다. 러시아와 몽골의 친선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 박사가 러시아 우주선으로 2008년에 처음으로 우주에 가봤으니, 우리보다 19년 빨리 몽골사람이 우주에 먼저 가 본 것이다.

 

1939년 할힌골 전투를 계기로 몽골과 만주 지역의 유목민들에게 반제국주의, 몽골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몽골 전체 인구의 5%나 되는 몽골인들이 숙청당했다. 몽골 여인들은 러시아 남성들에게 강간당해 혼혈아를 낳기도 하였다. 이는 몽골인들이 러시아에 대한 격렬한 반감을 가지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두 대국이다. 이들에 둘러싸인 몽골의 정치군사적 약세, 경제적 의존성에 따른 지정학적 위험은 몽골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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