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북방초원계 유물

한반도에 북방초원 문화가 유입된 것은 BC3~BC1세기경에 사슴문양의 청동기가 들어온 게 시초다. 이 시기에 초원지대 암각화와 비슷한 사슴문양의 청동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발굴 이후 100여 년간 한국 고대사학계의 미스테리였다. BC7~BC3세기 알타이 지역에 존재했던 파지릭 문화가 흉노를 거쳐 한반도의 신라로 파급된 것은 분명하다. <강인욱, '유라시아 역사기행'>

고고학적으로 우리나라 청동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북방초원계 유물들도 흉노와 고조선간 교류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발굴된 흉노의 이볼가 성터에서는 고구려와 옥저에서 사용했던 온돌이 설치된 주거지가 발견됐다. 한반도 북부의 문물이 흉노가 지배했던 바이칼 호수 인근까지 전파되기도 했던 것이다. 고대시대 선진문물의 유입이 동쪽에서 서쪽으로만 주로 유입되었기에 궁금해서 강인욱 경희대 교수에게 물었더니 초원이나 중국대륙의 문화가 더 발달했기 때문에 한반도는 주로 문화를 수입하였다고 한다. 우리민족이 수출한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온돌과 4∙5세기 고구려의 금속제 등자라고 한다. 금속제 등자는 인류전쟁사의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 중 하나다.

▲김해 대성동 가야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칸의 제국, 몽골, 2018’에 전시됐다. 입술 위쪽에 2개의 고리모양 손잡이가 솟았고 속에서는 3톨의 알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모양의 솥은 주로 중국 황하의 상류인 오르도스지역에 분포한다고 하여 ‘오르도스(ordos)형 동복’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용도는 흉노족 등 유목민족이 우유를 끓이던 그릇이다.
▲김해 대성동 가야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칸의 제국, 몽골, 2018’에 전시됐다. 입술 위쪽에 2개의 고리모양 손잡이가 솟았고 속에서는 3톨의 알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모양의 솥은 주로 중국 황하의 상류인 오르도스지역에 분포한다고 하여 ‘오르도스(ordos)형 동복’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용도는 흉노족 등 유목민족이 우유를 끓이던 그릇이다.

몽골시대 대규모 인적, 물적 교류로 고려양(高麗樣)이라는 고려 풍습이 원나라, 명나라 초기까지 유행했는데 이는 고려에서 80여년동안 끌려간 20만명 이상의 공녀, 환관들과 장인이 몽골제국에 정착하면서 이들을 통해 전파되었다. 당시 몽골제국 관료들은 집안에서 고려청자와 나전칠기로 장식하고 고려산 먹과 종이를 쓰며, 고려 화문석을 깔고 사는게 유행이었다. 또 진시황이 찾아다녔던 불로초가 고려인삼이라 믿고 개성인삼을 열심히 사갔다고 한다. 지금도 몽골에서는 고려만두, 고려병(약과), 고려아청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고, 상추 쌈을 싸먹는 것과 시루떡을 해먹는 것도 이 때 전파되었다. 비파 등의 악기도 전해졌다고 한다. 얼마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고려 금속활자가 몽골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된 것이라는 내용의 프랑스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 고려는 몽골제국을 통해 서역 저 멀리부터 세계 각지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고, 또 고려의 문물이 중국 건너편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TV드라마로 방영되어 널리 알려진 기황후는 원나라 말기 30년 가까이 권세를 장악한 인물이다. 원나라가 명나라에 멸망되기 전해인 1366년에는 기황후의 지시로 제주도를 망명정부의 근거로 삼아 피난 궁궐을 짓다가 중지한 사건도 있었다 한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13~14세기 몽골 귀족상.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13~14세기 몽골 귀족상.

 

몽골제국 이후에 석상 70개가 발견되어 석상은 몽골 역사 탐구에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몽골지역에는 약 500여 기에 이르는 석인상들이 분포돼 있으며 동몽골 다리강가에는 약 70여 기의 석인상이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다리강가의 석인상은 13~14세기에 건립된 몽골 석인상이라고 한다. 1990년 한몽수교 이후 다리강가의 석인상과 제주도의 돌하르방의 연관성이 주목받고 있다. 내 눈에도 다리강가 석인상과 제주도 돌하르방이 비슷해 보인다.

김기선이 쓴 ‘한몽교류사’를 보면 제주도는 몽골제국의 군사적 요충지로 약 100년간 몽골, 색목인들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유목문화 특성이 다분히 반영된 곳이다. 몽골 입장에서는 제주도만큼 목마장으로 몽골의 기후, 지형과 매우 흡사한 모든 것이 준비된 천혜의 요새는 없었을 것이다. 제주도 방언에는 몽골어 차용어가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있다. 다만 돌하르방의 기원에 대해서는 남태평양 발리섬의 석상문화가 제주까지 전파되었다는 남방기원설, 한반도 남부의 석장승이 제주도로 가서 돌하르방이 되었다는 한반도 유래설, 제주도 고대인들이 외부영향없이 독자적으로 제작했다는 자체생성설이 있기도 하다.

제주도와 동몽골의 다리강가(동북아 최대의 천혜 목장인 이곳의 자연환경은 제주도와 흡사함)에는 이 당시 두 지역의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많은 구전설화와 유물들이 존재한다. 다리강가의 목동과 말들이 통째로 탐라에 갔다는 구전설화도 전해지며, 몽골과 제주 양쪽에 각기 전해지는 몽골 주둔 군인과 제주여자의 사랑이야기, 다리강가의 석인상과 제주 돌하르방의 유사성 등도 눈에 띄는 교류의 흔적들이다.

 

고려 왕자와 몽골 공주가 들여온 ‘몽골풍’

몽골에서 고려에 들어온 풍습은 몽골풍(蒙古風)이라 부르는데, 몽골제국의 황실에서 큰 고려의 왕자들과 시집온 몽골의 공주들을 통해 민간에 퍼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시절에 농부들로부터 시작된 소주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몽골을 통해 고려의 몽골군 주둔지부터 전파되기 시작해 지금은 우리가 제일 많이 마시는 술이 되었다.

설렁탕, 순대 같은 음식도 이 시기에 고려로 전파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한반도에 탕요리가 많은 것은 유목민과 접점이 많았던 때문인지, 원래 한반도의 문화였는지, 몽골제국 시대부터 한반도에 전래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탕 같은 음식은 농경문화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고 유목문화에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의 족두리, 연지, 곤지도 이 시기 몽골풍에서 유래하였다.

▲우즈베키스탄 여행중에 달력에서 발견한 연지.
▲우즈베키스탄 여행중에 달력에서 발견한 연지.

볼과 입술을 붉은 색조로 치장하는 것을 연지라고 하고, 연지를 사용해 이마에 동그랗게 칠하는 것을 곤지라고 한다. 샤머니즘 문화권에서 잡귀가 싫어하는 붉은 색을 칠한 것인데, 중국 은나라 주왕 때부터 있었으며, 고구려 무용총에도 연지 화장이 있다. 고구려 악공이 이마에 연지를 발랐고, 일본에도 전파했으며 신라의 여인들도 연지 화장을 했다. 고려에서는 연지를 쓰지 않았는데, 몽골제국때 고려에 재수입 된 것으로 보인다. 연지곤지는 혼인하는 새색시 화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몽골제국시대에 준지배계층이었던 상당수의 위구르인들은 사신, 통역관, 몽골 귀족의 시종, 상인 등으로 고려에 와서 정착하였다. 고려로 시집오는 몽골공주들이 데려온 시종들 중에는 위구르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몽골공주의 위세를 뒤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충령왕의 왕비, 쿠빌라이 막내딸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와 귀화한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2017년에 공개된 1833년 필사본 ‘흥보만보록’에는 주인공인 흥부가 무과에 급제하며 덕수 장(張)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필사본에 따르면 흥부의 실제 모델이 위구르 귀화인 장순룡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성장수라는 위구르인은 정몽주와 한 편이 되어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고 조선 초에는 최고위층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위구르인들은 당시 몽골 왕족들과 손을 잡고 ‘오르톡’이라는 조합을 만들어 몽골제국의 전매제, 금융대출 등으로 몽골제국의 상권을 독점했는데 고려에서도 오르톡을 활용하여 커다란 부를 축적하였을 것이다. 개경에 이들 위구르인들이 모여사는 ‘회회인 타운’이 있었고 고려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아비’도 이들을 일컫는다. 회교라는 단어도 위구르인의 종교라는 뜻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몽골 군벌 출신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가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동북면 일대를 근거지로 구축하고 몽골제국에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직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비몽골인이 다루가치가 될 수 없으니 이성계의 조상 중에 몽골인이어야 한다. 이 때문에 이성계 조상 신화는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기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태조 이성계는 몽골제국 소속의 다루가치 가문 출신이며,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와 함께 조선으로 귀순했다는 사실이다.

▲몽어노걸대, 첩해몽어, 몽어유해는 조선시대의 몽골어 학습서이며, 흔히 셋을 합쳐 몽학삼서라 부른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칸의 제국, 몽골 전시회, 2018’에서 찍었다.
▲몽어노걸대, 첩해몽어, 몽어유해는 조선시대의 몽골어 학습서이며, 흔히 셋을 합쳐 몽학삼서라 부른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칸의 제국, 몽골 전시회, 2018’에서 찍었다.

 

세종대왕과 몽골제국, 이슬람 문화의 인연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도 수천년간 실크로드 상인들의 전지구적 소통과 깊은 연관이 있다. 7~8세기 이후 북방 초원민족들은 새 국가를 세우면 새 문자를 제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한글은 초성(자음) 32자와 중성(모음) 11자를 합해 43자로 만들었는데, 이는 몽골제국의 파스파 문자의 43자모와 일치한다. ㄱ, ㄴ, ㄹ, ㅂ, ㅍ 등 글자 형태도 같다. 한글창제에 파스파 문자가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집현전 학자들 중에 신숙주 등 몇 명은 최고 수준의 위구르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몽골제국을 통해 연결된 당시 이슬람 문화권은 세계 최고의 선진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연금술, 항해술, 천문 기상학, 수학, 물리학 등이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 ‘팍스 몽골리카’를 통해 고려, 조선에 진출한 위구르인들이 조선 초 천문, 기상, 의학 분야에서 찬란한 과학문명을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가 설과 추석을 셀 때 쓰는 음력의 과학적 원리도 이 시절 이슬람 역법인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는 '한-이슬람 교류사'에서 세종대왕때 만든 측우기, 자격루 등 각종 발명품들은 세계최고 수준의 이슬람 기기와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이를 보완, 발전시켜 제작된 것으로 보았으며 몽골제국에 도입됐던 이슬람 천문 과학기기의 구조와 기능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격루도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미 8세기 압바스 시대에 소리나는 물시계가 고안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슬람 의학도 팍스 몽골리카를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는데 조선 초기에 설치한 전의감은 이슬람 의학을 취급하던 원나라 관청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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