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고구려원정에 대한 다른 견해

먼저 한국사에서 삼국통일전쟁 역사를 보면 고구려와 당나라의 대결이 본질적 대립이었으며 당시 국제정세의 기본 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동아시아역사의 기본 흐름인 북방유목문명(흉노, 선비, 돌궐, 거란, 몽골, 여진 등)과 장성 이남의 농업정주문명(중국 한족)간 대립의 일환인 고구려-수∙당 전쟁의 여파로 이루어진 부차적인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한수 유역 쟁탈전 이후 적이 된 고구려와 백제 동맹세력에 맞서 스스로 안보 위협을 느껴 당나라와 손잡고 참여했을 뿐이다. 즉 신라는 처음부터 삼한일통 같은 국가적 비전을 갖고 삼국통일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군사를 지휘한 김유신과 손잡고 대외관계를 도맡아 삼국통일의 2대 영걸로 불리우는 김춘추가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선 계기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백제 의자왕에 대야성(경남합천)이 함락되고(642년) 딸과 사위가 죽임을 당한 사실을 전해 듣고 움직였다.

비탄에 빠졌던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군사를 빌리기 위해 고구려(642년)와 일본(647년)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방문하였으나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진덕여왕 2년(64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고구려원정(645년)에 실패한 당 태종을 만나 마침내 나-당동맹을 구축한다. 동맹의 내용은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고구려, 백제를 정벌한다는 것을 전제로 △신라는 패수(청천강)이남까지는 신라가 차지한다(당연히 오늘날 평안도와 함경도를 포함해 만주의 고구려영토는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것이고) △중국의 문물을 따르고 중국식 연호를 채택한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한국사에서 본격적인 사대주의와 소중화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결국 백제를 멸하는 것은 신라의 안위를 위해 불가피한 국가적 과제의 수행이었음은 분명하지만, 백제와 의자왕에 대한 김춘추의 개인적 복수심은 삼국사기에 나오듯이 백제멸망이후 그를 사로잡은 김춘추와 아들이 의자왕에게 가한 모욕적 행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안보의 주적이었던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나당동맹 약속에 따라 고-당전쟁에 소극적으로 끌려들어간다. 고-당전쟁에서 신라가 담당한 역할은 별로 없는데, 평양을 포위 중이던 당나라군대에 식량을 운송하는 정도였으며, 당군이 평양성을 함락할 때는 신라군이 늦게 출병한 것에 대해 질책을 받기도 했다.

남북조시대의 오랜 분열을 끝내고 등장한 통일왕조인 수나라와 고구려의 충돌은 필연에 가깝다. 기실 고구려가 한사군을 축출하고 만주를 석권하여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후한이후 중국대륙이 삼국시대, 5호16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로 오래 분열됐던 게 있었다. 또 진한시대에 정초되기 시작한 중국의 화이적(華夷的) 천하관(天下觀)은 이때까지는 팽창을 멈추지 않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 중국역사를 통틀어 볼 때 실제 역사시대로 확인되는 상(商), 은(殷) 이래로 화하족(華夏族)이 지역적 팽창을 계속 해왔음은 강역과 판도를 나타낸 역사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의 중국 강남은 춘추전국시대에 오(吳)와 월(越)에 속했던 땅이며 알다시피 월(越)은 지금의 베트남을 가르킨다. 즉, 지금의 양쯔강 이남의 대부분은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민족들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까지 수, 당이라는 통일왕조는 만주는 물론이고 한반도까지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하려는 야욕이 있었던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백제(660년)와 고구려멸망(668년) 이후 당은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고,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대도독부의 대도독으로 임명하였으며 고구려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몽골제국과 고려의 치열한 39년 전쟁과 부마국 고려

▲13세기말 원나라 지도.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한반도(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다. /wikimedia commons
▲13세기말 원나라 지도.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한반도(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다. /wikimedia commons

고려의 여진정벌 이후 100여년 뒤 몽골제국은 금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칭기즈칸의 몽골제국과 고려의 관계도 독특하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28년간 벌어진(최씨 무신정권의 항쟁까지 합치면 1270년까지 39년간) 여몽전쟁은 전국토가 초토화된 한민족 최악의 수난사 중 하나이다. 당시 민초들의 고난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참담했다 한다. 전쟁이 끝나고 700년이 지난 1970년대에 칭기즈칸이라는 유럽 팝그룹이 부른 ‘칭기즈칸’이라는 노래가 히트였는데, 유신정권에서는 우리민족을 침략한 칭기즈칸을 숭상하는 노래라고 방송금지를 시켰었다. 징기스칸 군대가 유럽을 침략한지 80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일부 서양인들은 아시아를 무서워하는 황화론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려 원종이 태자시절인 1259년 몽골과 강화를 맺기 위해 사천에 원정 중이던 몽케 칸을 만나러 가다가 몽케칸이 급사했다. 당시 화북지역을 지배하던 쿠빌라이와 몽골고원의 아리크부카 사이의 칸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을 때, 원종은 쿠빌라이를 택하고 그를 찾아가 항복하는데 이는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원종의 항복이 팽팽한 저울의 추를 쿠빌라이에게 기울게 하면서 몽골의 운명을 바꿔 놓았을 수도 있다.

쿠빌라이는 원종의 항복이 너무 기뻐서 "고려는 머나먼 나라로 그 옛날 당태종이 쳐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나라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말했다 한다. 쿠빌라이는 고려 고종이 사망하자 원종을 국왕으로 책봉하며,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고유한 풍습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을 한다. 쿠빌라이 눈에도 고려가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또 쿠빌라이가 권력다툼의 헤게모니를 잡는데 고려 원종의 투항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은 거란계의 일파인데, 몽골에 200여년 앞서 고려를 침략한 거란이 귀주대첩 등의 참담한 패배로 국력을 소진하고 금나라에 망하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쿠빌라이는 원종의 항복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이례적으로 자신의 막내딸, 칭기즈칸의 증손녀, 제국대장공주를 고려 충렬왕에게 시집을 보낸다. 덕분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한편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금나라, 위구르, 남송은 직접 지배하고 나머지 지역들은 대칸 일족들이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칸국, 일칸국 등 분국을 수립해서 지배했는데, 고려만 예외적으로 왕조와 영토를 남기면서 다루가치를 통해 간접지배 하였다. 이 시기 고려는 정치적으로 몽골제국의 '부마국'이라는 종속성과 '고려’라는 독립왕조의 독자성이 병존했다. 1310년 원나라 무종(武宗) 카이샨은 "짐이 보건대 오늘날 천하에서 민사(民社, 百姓과 社稷)를 보유하며 왕위를 누리는 것은 오로지 삼한(三韓)뿐"이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백여년에 걸친 이 시기는 몽골과 한반도 간 가장 긴밀하게 많은 인적, 물적 교류가 진행된 시기였다.

몽골제국이 고려만 특별대우한 것은 고려 원종이 패를 잘 보고 쿠빌라이에게 항복을 한 외교전의 승리였을까? 그보다는 고려 민중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 특별 대우를 해준 것일 것이다.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도에 틀어박혀 자기들의 안위만 지키고 오히려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세계최강의 군대로부터 도망갈 곳이 없는 고려민중과 지방군들은 수십년간 전국토가 피폐화되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만 6800여 명이다. 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란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고려사’ 권24 고종 41년조>

여몽전쟁 30여년은 임진왜란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1231년부터 9차례에 걸친 장기전에서 고려도 참혹하게 초토화되었지만 남송과도 전쟁을 벌이고 있던 몽골제국 입장에서도 여몽전쟁이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고려를 손아귀에 넣은 몽골제국은 일본침공을 준비하다가 2번의 가미카제 태풍으로 실패했다고 한다. 그런데 태풍으로 일본침공이 실패했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설명이 아닌가? 최근 일본의 학계에서는 “한반도가 일본의 방파제 역할을 해줬다”라고 이야기한다. 여몽전쟁 30여년 동안 체력을 고갈시킨 몽골제국은 힘이 소진되어 일본 침공을 지속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명나라의 쇠퇴, 청나라의 부흥

임진왜란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왜군은 당대 세계최고의 육군이었다. 이들은 조총이라는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하고 사무라이를 포함한 복합 군대였다. 거의 같은 시기인 1588년 스페인이 군대를 총 동원해 무적함대로 영국을 공격했을 때 인원이 3만명이 안된다. 이렇듯 유럽역사를 뒤흔든 중요한 전투에 투입된 인원이 3만명이 안 되는데 일본군 16만명이 조선땅에 들어왔다는 것은 작은 전쟁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명운이 걸린 전투였다. 민병, 승병까지 일어나 세계 최강의 화력을 가진 일본군대를 무찔렀다는 것은 것은 처절하기는 했지만 한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일이다. 명나라가 원군을 보낸 것은 조선과의 의리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게 정복당하기 싫어서 보낸 것이다.

원나라를 북쪽으로 밀어낸 명나라는 한반도에서 벌어진 조선-명-왜의 국제전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에 쇠퇴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명이 임진왜란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누르하치가 세력을 키워 후금-청 왕조로 성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있어났을 때 명은 북원과 대치 중이었지만 일본이 정명향도(征明嚮導)를 조선에게 요구하였으니 어쩔 수 없이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여진의 누르하치 세력은 번영의 계기를 맞게 된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원군을 이끌었던 이여송은 여진족의 리더였던 이성량의 아들이었고, 명나라 군사들은 대부분 여진족 출신의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는 임진왜란때 명의 견제를 피해 여진족을 통합하고, 세력을 키워 청나라 건국의 토대를 닦았다. 1618년에 금나라를 계승한 대금을 세우고, 대금은 후에 청으로 발전한다.

이후에도 한반도와 몽골의 질긴 인연은 17세기까지 계속된다. 명에게 쫓겨난 원은 내몽골로 쫓겨가 북원을 세우고, 한반도에서 새로 개국한 조선은 친명노선을 걷는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두차례 큰 전쟁으로 세력을 키운 만주의 누르하치 세력은 17세기 홍타이지에 이르러 친명노선을 걷던 조선을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두차례 굴복시켰고, 이는 친누르하지-북원세력(내몽골)을 규합하고 반누르하치-북원세력(외몽골)을 굴복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홍타이지는 청나라를 건국하고 북원의 친 누르하치 세력과 북원을 공격해 항복시키고 몽골제국의 옥새와 대칸의 지위를 받아낸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은 명나라 멸망, 청나라 부흥의 티핑포인트이자 몽골족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와 위기였다. 반누르하치–북원계열은 2차대전이 끝날 때 소련의 지원으로 몽골로 독립을 했고, 친누르하치-북원계열은 중국에 남아 내몽골 자치구가 되었다.

지난 2000년 역사를 통시적으로 다시 본다면 한반도 역사는 동아시아 역사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지배변수였다. 한반도는 지난 2000년간 동아시아 역사의 변방이면서 또 중심 무대였다. 중국을 정복하고자 하는 유목제국들은 반드시 한반도를 제압해야 했으나 어떤 유목제국이나 해양세력도 산성과 화살, 쇠뇌로 무장한 한반도를 호락호락하게 지배하지 못했다. 20세기 이후 해양세력이 대두하면서 한반도는 중국, 러시아의 대륙세력과 미국, 일본의 해양세력이 격돌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가 일제 식민지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지금 21세기 미∙중 패권다툼은 또 다시 한반도에 격동의 세월을 몰고 올 것이다.

 

한반도와 몽골의 오래된 인연

몽골은 선사시대때부터 수천년간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고 지금 21세기 한반도 사람들의 삶 곳곳에도 몽골의 영향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고대에 유라시아 초원은 한반도보다 선진적인 문명을 가지고 있어서 초원문명은 몽골을 통해 수천년간 한반도에 유입되어 왔다. 역사시대 기록에는 그 문명교류의 아주 일부만이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소주도 몽골제국이 서아시아를 점령했을 때 양조법을 배웠는데, 일본을 치려고 준비할 때 몽골군의 주둔지, 개경, 등에 양조장을 만들었고, 이 소주가 21세기 한반도 사람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술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김기선의 ‘한∙몽골 교류사’를 보면 몽골 사람들은 중세 이래로 한민족을 고려(高麗) 한자음의 음역인 ‘가올리’ ‘고올리’가 아닌 무지개를 뜻하는 몽골어 ‘솔롱고스’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몽골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가까운 한민족을 다른 민족과 달리 불러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무지개, 담비, 쇠, 설렁(Solon)족 등 다양한 설이 있는데 솔롱고스의 어원이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중세 이후에 몽골민족의 고려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부 몽골인들은 메르키드족이 남하하여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믿고 있다.

▲ 아워는 돌무지 신앙물로 몽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티베트에서는 ‘도’라고 부르고,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은 ‘오도’라고 부르는 유사신앙, 한반도에는 ‘서낭당’이 있다. 퉁구스 족에게는 돌무더기 위에 신목을 꽂는 ‘아오’라는 신앙이 있는데 이들 돌무더기 신앙은 형태상 모두 유사하다.
▲ 아워는 돌무지 신앙물로 몽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티베트에서는 ‘도’라고 부르고,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은 ‘오도’라고 부르는 유사신앙, 한반도에는 ‘서낭당’이 있다. 퉁구스 족에게는 돌무더기 위에 신목을 꽂는 ‘아오’라는 신앙이 있는데 이들 돌무더기 신앙은 형태상 모두 유사하다.

아워는 유목민의 자연관을 대변하는 상징물로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아닌, 자연을 숭신하며 인간의 욕망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동북아에 넓게 퍼진 돌무지 신앙은 언제부터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아시아에 수천년 내려오는 샤머니즘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북방초원에 유목 문화가 들어오기 전부터 동아시아에는 샤먼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종교 문화가 발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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