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 유목제국의 흥망성쇠는 한반도 국가들의 흥망성쇠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중국대륙, 몽골, 만주 초원, 한반도 3개 지역의 역사는 서로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큰 그림으로 역사를 보면 한반도는 결코 변방이 아니다. 한반도를 세력권에 두지 못한 흉노, 돌궐, 거란같은 유목제국은 중국대륙을 정복하지 못하였고, 고려침공과 병자호란으로 한반도를 손안에 두었던 몽골과 청은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고구려-수나라 전쟁, 고려-거란 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동북아 질서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고 수나라, 명나라, 청나라같은 중국 왕조들의 멸망을 불러왔다. 중공의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아들을 잃었고 대만독립을 지켜봐야만 했다. 지금도 중국 지도자들은 한반도에 잘못개입해서 멸망했던 중국왕조들의 역사를 보며 한반도 개입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의 흉노 강역도. 고조선과 흉노는 아주 밀접한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가 고조선과 흉노를 멸망시키면서 동아시아 질서 전체를 500년 이상 흔들어 놓았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의 흉노 강역도. 고조선과 흉노는 아주 밀접한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가 고조선과 흉노를 멸망시키면서 동아시아 질서 전체를 500년 이상 흔들어 놓았다.

고구려 건국보다 70년쯤 앞서 기원전(BC)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켰을 때 한나라는 구차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고 기뻐했다. 한나라는 결과적으로는 고조선의 내분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셈이었지만 정작 전투 자체에선 제대로 고조선을 이겨보지 못했다. 한나라의 고조선 원정 장수들이 나중에 포상이 아니라 처형을 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한서의 기록을 보면 2500년전에 몽골초원에서 발흥해 한나라와 주도권을 겨루던 흉노는 고조선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설치는 흉노와 한나라의 팽팽한 균형을 한나라로 기울게 만들었을 것이다. 고조선이 내분으로 멸망하지 않았다면 한나라가 흉노를 이길 수 있었을까.

BC133년부터 기원후 89년까지 220년간 벌어졌던 한나라와 흉노의 전쟁은 5 호 16 국 시대까지 이어져 이 지역 분쟁은 500년간 지속된다. 이후 새로운 강자 선비족이 초원의 패권을 가져가며 수, 당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우리 한반도 역사의 기본구도가 이 시기에 새로 형성됐다. 고조선이 사라진 동북방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는 부여, 고구려(BC37 건국)를 비롯해 예맥, 동예, 옥저 등 여러 세력이 등장했고,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이 자리 잡고 신라(BC57건국), 백제 (BC18년 건국), 가야가 등장했다. BC108 년 고조선 멸망 이후 불과 한세기 정도 지날 무렵까지 차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후 2,000년 이상 몽골초원과 만주의 격동은 지난 20세기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뒤흔들었고, 한민족의 격동은 고구려-수당 전쟁,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통일, 고려-거란 전쟁, 임진왜란, 2차대란, 한국전쟁을 거쳐 만주, 몽골초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중국대륙, 동아시아 전체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고구려, 수, 당, 돌궐의 격돌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돌궐의 강역도, 동돌궐, 서돌궐 시대인데 만주,한반도를 삼국시대가 아닌, 발해, 신라 이국시대로 잘못표기 하였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돌궐의 강역도, 동돌궐, 서돌궐 시대인데 만주,한반도를 삼국시대가 아닌, 발해, 신라 이국시대로 잘못표기 하였다.

6~7세기 몽골초원의 흥망성쇠는 한반도의 흥망성쇠와 직접적,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준다. 초원과 만주의 패자는 근대에도 중국역사의 폭풍의 눈이 되어왔다. 6세기 후반 동돌궐과 서돌궐이 분열하자 수나라는 서돌궐을 부축 동돌궐을 공격하게 하고, 동돌궐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한다. 수나라는 돌궐과의 관계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고구려를 침략한다.

고구려는 본디 미천하여서 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수나라와 당나라가 흥하고 망한 것은 모두 이 고구려와 관계가 된다. 수 문제가 새로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그 당시에 돌궐은 이미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하였다. 양제가 순시하다가 친히 돌궐의 장막에 이르러서 우연히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배구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드디어 이 화를 일으켰다. 배구는 천하의 대세가 이미 합해진 것을 보고는 역시 고구려에서도 조공을 바치게 하여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천하 대란의 단서가 여기에서 발단될 것은 알지 못하였다. <'도서편(圖書篇)'>

서기 612년 2차로 고구려를 쳐들어온 수나라 100만대군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이때 수나라의 패배는 중국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로 여겨진다. 중국인이 세계에 자랑하는 ‘경극’에서 칼을 다섯개나 차고 끝까지 주인공을 겁박하는 무서운 인물이 연개소문이다. 덕분에 중국사람에게 연개소문은 흉악한 오랑캐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고구려-수∙당전쟁의 트라우마가 14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중국인들의 트라우마에 남아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4차에 걸친 수나라 침공을 모두 막아내고 수나라의 국력을 모두 소진시켜 멸망하게 만들었다.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가 멸망하고, 같은 탁발선비계열 당나라가 건국된다. 이때 돌궐이 강성해지자 당나라는 돌궐에게 신하로서 복종하지만 오래지 않아 돌궐에 내분이 일어나고 자연재해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역전된다. 중국이 분열되면 중국이 돌궐에 복속되고, 돌궐이 분열되면 돌궐이 중국에 복속되는 주도권 교차가 이루어졌다.

당나라는 630년 동돌궐을 복속시키고 당태종은 ‘천가한 (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의미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쿠빌라이칸, 17세기 청나라 황제들도 한족들에게는 ‘황제’로 불리고 북방 유목민들에게는 칸으로 불리우는 이중적 정체성을 보여줬다.

당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침공했을때 자치통감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병신일(5월 29일) 우위대장군 이사마(李思摩, 아사나사마를 지칭)가 강노(强弩)의 화살을 맞자 황상이 친히 그를 위해 피를 빨았는데, 장사(壯士)들이 이 소식을 듣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백암성 전투에서 화살을 맡은 돌궐 기병장수 이사마의 상처를 당 태종이 직접 피를 빨아 치료를 해준 것인데, 이로 인해 돌궐인들은 이사나사마에 대한 배려를 자신들에 대한 배려로 느끼고 사기가 크게 올랐다. 당의 황제가 돌궐 기병의 피까지 빨아주면서 치료를 해줬다는 것은 고구려 침공시에 당나라에게 돌궐기병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때 돌궐 목간 칸이 “남쪽에 효성이 지극한 두 아이(북주와 북제)들이 있는데, 내게 물자가 부족할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돌궐은 기세 등등했다. 만약 돌궐이 당에 먼저 무너지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정복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돌궐과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같이 수∙당을 견제하던 돌궐이 무너지면서 돌궐 기병은 당나라의 용병이 되어 고구려, 백제 정복의 선봉에 서서 맹활약을 한다. 당나라는 수십년간 전면전을 벌여 결국 서기 668년 당 고종 때 고구려의 내분을 이용하고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그럼에도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의 여파로 엄청난 국력을 소모해 주변 이민족을 통제하지 못했다. 이 때 토번(티베트)이 급성장하여 당의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르게 된다. 신라와 티베트는 당의 동부와 서부에서 동시에 당과 전쟁을 벌이면서 신라는 당의 점령에서 벗어나게 된다. 당나라는 기껏 점령한 고구려 영역도 힘이 달려 반쯤 무주공산으로 방치했다. 서기 682년 후돌궐이 다시 일어나자 698년 발해가 건국을 하게 된다.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오르혼강가에는 732년에 세워진 퀼테긴비가 있다. 돌궐의 칸 퀼테긴의 비문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해가 뜨는 동방의 나라 ‘뵈클리’가 두 번 언급된다는 사실인데, 그 나라가 바로 고구려라고 한다. 고구려에 대한 기록 중 하나는 조문 사절을 보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을 도와 원정한 나라라는 것이다.

 

거란, 여진, 고려, 송 그리고 중국대륙의 패권

200여년 뒤 고려시대에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26년 동안 강감찬장군의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고려-거란(요) 전쟁이 있었다. 몽골족도 거란족의 일파이니 칭기즈칸의 몽골족들도 이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거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는 동북아에서 고려-요, 송간 3강 체제를 만들고 이후 120년간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 송나라 속자치통감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천성(天聖) 3년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 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거란은 (고려를)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이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거란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나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거란이 반드시 고려가 후환이 될 것을 의심하여 끝내 감히 무리를 다하여 남하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는 중국의 큰 이로움입니다. <‘속자치통감’ 권150 인종 경력 4년 6월 무오.>

고려-거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는 동아시아의 3강으로 떠오르며 이후 120년간 정치적, 경제적 태평성태를 누리게 되었다. 고려사신들은 당시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이었던 송나라에 가서도 나라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로 선물을 받아왔다고 한다. [1]‘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에 따르면 고려사신들의 횡포가 심하자 송나라의 대문호 소동파는 “고려는 상종 못할 오랑캐”라고 하며 일곱 차례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에서 대패해서 휘청하였고 결국 송나라를 정복하지 못하고 여진족의 금나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후 100년 동안 북중국을 지배한다.

고려-거란 전쟁이 벌어지고 약 100년 뒤인 1104년부터 1109년까의 5년에 걸친 고려의 여진정벌도 동아시아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거란과 고려 사이에 끼여 있던 여진은 고려-거란 전쟁에 큰 피해를 봤지만 이후 점차 강성해졌고, 고려에서 윤관을 내세워 함경도 일대의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9성을 세웠지만 집요한 여진의 공격으로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고려의 여진정벌을 계기로 여진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뭉쳐서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요)을 멸망시킨다. 고려와 치열한 전쟁에 혼쭐이 난 여진족은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고려의 여진정벌이 끝난지 불과 16년 사이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을 남쪽으로 몰아낸 후 화북지역을 점령한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한다. 북중국의 패자가 되어 강성해진 금나라도 고려-여진정벌의 혹독한 경험으로 고려를 침공할 엄두를 내지 못해 금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금사’ 외국 열전 고려조 천회 2년(11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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