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의 발전이 인류의 역사를 지배했다.

말은 지구력이 약하고 거칠어서 다루기 쉽지 않지만 초원의 어떤 동물보다 빠르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신속한 이동이 생명인 초원에서 수많은 가축을 관리했던 목동들은 자연스럽게 말을 탈것으로 이용했던 것 같다. 또 말을 잘 다루는 자가 초원을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말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마구가 필수적이다. 마구의 발전이 인류의 역사를 좌지우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장에선 조금 더 앞선 마구 기술이 전장의 승패를 좌우했다. 선진 마구 기술은 전차와 기마병, 운송수단에 적용되면서 수많은 제국들과 인류의 역사를 흔들어 놨다.

▲칭기즈칸 마동상 박물관에 걸린 마구.
▲칭기즈칸 마동상 박물관에 걸린 마구.

17기원전 30세기경 재갈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약간의 손짓으로 만으로도 말에게 일시적인 치통을 가할 수 있었다. 재갈 덕에 말은 먹거리에서 사람이 조종할 수 있는 탈 것으로 바뀐 것이다. 재갈은 이후 개량을 거듭하다가 한 사람의 마부가 여러 말을 동시에 부릴 수 있는 고삐로 발전했고, 이는 전차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전차가 발명되며 말은 운송수단에서 전쟁무기의 역할이 더해진다. 참고로 안장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말의 덩치가 작아 한 사람의 몸무게를 지탱하기가 힘들었다. 여러 필의 말이 전차를 끌면서 말이 전쟁무기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두번째 혁신적인 변화는 안장이다. 울퉁불퉁한 척추뼈가 드러난 말을 안장없이 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기원전 800년전에 스키타이들은 부드러운 카펫을 두껍게 얹은 안장을 사용했고, 흉노 시대에는 나무로 만든 딱딱한 안장이 발명되었다. 사람들은 보다 안전하게 말을 탈 수 있게 되었다.

세번째 발명은 말을 탄 사람의 발에 거는 금속제 등자다. 나무 발걸이는 기원전부터 유목민들이 개발하였다. 기원후 3~4세기에 고구려와 선비족에 의해 금속제 등자가 발명되면서 중무장 기사가 나타났다. 고구려와 수∙당의 부상도 금속제 등자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금속제 등자는 고구려에서 사용되기 시작한지 400~500년이 지나 기원후 800년경에 서유럽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등자의 도입은 손쉽게 기병을 육성할 수 있게 하였고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켜 그 이후 1차대전까지 유럽에서는 기병이 활동하였다.

18유목민들은 말, 전차, 활 등 강력한 무기와 기동력을 바탕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전차를 만들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에 보급하고 인도 등의 농경민들을 정복하기도 했다. 기원전 8세기 스키타이의 황금전사들이 초원을 휩쓸고 다녔고 기원전 4세기 중국 북방에서는 흉노가 나타나 거대한 유목제국을 세웠다. 그 이후 돌궐, 거란, 몽골, 만주족 등의 유목민의 발흥에 따라 유라시아 세계의 역사가 움직였다.

▲칭기즈칸 시기의 몽골기병을 재현한 모습.
▲칭기즈칸 시기의 몽골기병을 재현한 모습.

스키타이가 발흥한 기원전 8세기 즈음부터 만주족의 청나라가 세워지는 서기 17세기까지 유목민들은 ‘말’ 덕분에 동서양을 통틀어 최강의 무력 집단이 되었다. 그 당시 전쟁의 필살기였던 기마술과 궁술, 투창술 등을 대부분의 유목민들은 자연스럽게 갈고 닦아 타고난 기마전사가 되었다. 농사가 주업인 정주민들이 기마술과 궁술에 일부러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서 배워야 하는것과 비교하면 유목민족은 처음부터 강력한 기병전력을 갖추고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농경민들이 아무리 열심히 기마술을 훈련해봐야 걸음마보다 승마를 먼저 배운 유목민들과 수준차이는 좁히기 힘들었다. 오히려 농경민들이 가까이 있는 유목민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유목민을 견제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유목민의 흥망성쇠, 이대로 명을 다하고 마는 것일까

몽골제국은 전세계의 기술을 짜깁기해 획기적인 발명품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대포이다.19중국의 화약과 무슬림의 화염방사기를 결합시킨 뒤 유럽의 종 주조기술을 응용하자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과학기술 혁신 제품인 대포가 탄생했다. 아이러니하게 근대에 대포와 총기같은 화약무기가 발전되어 농부들에게도 총기를 지급할 수 있게 되면서 기병이 몰락하게 되고, 그 기병이 주력이었던 유목제국도 같이 몰락하게 되었으며, 때마침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며 세계의 주도권이 서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몽골제국이 중원에서 명나라에 쫓겨난 것도 주원장과 홍건적의 총에 밀렸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역사도 농경과 유목의 관점에서 다시 편집해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만주보다 한반도, 특히 한강유역에 집중한 이유도 농경을 통한 풍부한 식량의 확보였을 것이다. 만주는 반농반목의 유목적인 지역인데, 논 벼농사도 그나마 구한말 조선인들이 간도에서 시작되었다. 고려말 공민왕때 요동을 가질 수 있던 기회를 포기했던 것도 농경민의 입장에서 요동이라는 별로 얻을 것도 없는 땅에서 힘들여 지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칭기즈칸 마동상 박물관의 ‘알랑고아 설화’ 그림, 알랑고아는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을 불러 5개의 화살을 꺾어보라 하지만 아무도 5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꺾지 못한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한 대씩 화살을 주자 자연스럽게 꺾었다. 이런 비유를 통해 형제 간의 우애와 화합을 부탁하고 알랑고아는 죽는다. 칭기즈칸은 알랑고아의 막내아들 보돈차르의 10대손이다.
▲밝게 웃는 몽골인 자매, 70년대 한국 시골의 소녀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유라시아 초원에서 유목민의 역사가 급격히 쇠락한 것은 대항해시대 이후에 유럽의 해양세력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부터다. 이후 산업혁명과 해양교역 중심으로 글로벌 물류가 바뀌면서 유라시아의 대초원은 역사의 변두리로, 지구촌의 오지가 되어간 것이다.

2021세기에 들어서 유라시아의 초원지대가 경제적으로 급격히 성장하면서 거친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들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중국의 내몽고는 무분별한 농지개발로 사막화가 진행되어 한국까지 황사가 심해지고 있고, 목화재배 등 농경 때문에 아랄해로 흘러가는 강수량이 줄어들어 아랄해가 사라지고 있다. 유목민들은 도시화와 경제개발에 쫓겨 북쪽의 더 척박한 지역으로 밀려나고 있다. 중국 북방 유목민의 상징인 오르도스는 급격한 경제개발과 부동산 과잉투자로 중국 거품 경제의 상징이 되었다. 유목적 삶이 가장 잘 보존된 몽골조차 도시화와 경제개발로 양 떼가 유유자적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북방초원 고고학자인 경희대 강인욱 교수는 “세계사의 절반을 이끌어온 유목민의 역사가 이렇게 허무하게 그 명을 다하고 마는 것일까?”라고 했는데 필자도 그의 생각에 백프로 동감한다.

 

군사공동체, 이익공동체 몽골족의 탄생

몽골족이 오래전부터 몽골고원에 살았던 민족이라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몽골고원에서는 80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고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몽골고원에는 수많은 씨족들과 민족들이 거쳐갔다. 흉노가 기원전 3세기 경 첫 국가를 세워 기원후 1세기까지 유지됐으며, 이후 선비(2~4세기), 유연(5~6세기), 돌궐(투르크·6~8세기), 위구르(8~9세기), 거란(10~12세기), 몽골제국 (13세기-)이 등장한다. 특히 흉노와 돌궐은 중국을 위협할 만큼 강력했으며 선비나 유연 등도 중국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중에 흉노와 돌궐은 거대한 유목제국을 세웠고 인류역사 전체를 세차게 흔들어 놓았다.

몽골족이란 칭기즈칸이 13세기 초에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창시한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이고 동시에 군사 공동체이며 이익 공동체이다. 몽골족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실위’는 거란계의 일파로 9세기 후반부터 몽골고원 동부 쪽의 대흥안령 부근에서 몽골고원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대흥안령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몽골인의 선조 실위는 몽골 유목민의 전형적인 특징인 ‘기마∙양 유목민’이 아니다. 오히려 실위는 소와 돼지, 말은 길렀으나 양을 기르는 풍습은 없었다.   실위인의 경제생활의 중심은 유목이 아니라 목축과 농경이 혼합된 일종의 반목반농의 형태를 유지했고 지역의 특성상 수렵과 어로가 보조적인 경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실위는 선비족 계통이며, 중국 사서를 보면 거란과 풍습이 비슷하고 언어가 같았다고 하니 거란과 같은 뿌리이다.

9세기 중반 키르기즈의 침공으로 위구르 제국이 붕괴되고 몽골고원은 진공상태가 되었다. 이때를 노려 9세기 후반부터 대흥안령 기슭에 거주하던 몽골족이 푸르른 초원의 몽골고원으로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칭기즈칸의 조상인 몽골실위는 12세기에 이르러 원주지인 에르구네 강 하바나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톨라, 오논, 케룰렌의 삼하(三河)가 발원하는 부르칸 칼둔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산악지대라 먹고 살기가 풍족하지 않았을 것이고 몽골통일전까지 칭기즈칸의 일족들도 그리 넉넉한 살림살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대흥안령 부근에 살던 몽골족의 일파인 키타이족 (거란족, ‘키타이’라는 말이 ‘카타이’를 거쳐 ‘차이나’가 되었다.)은 10세기에 중국의 북쪽을 침략해 요나라를 세웠다. 1125년 여진족에 의해 요나라가 멸망하자, 쫓겨난 거란족들은 오늘날 카자흐스탄 지역에 있던 이슬람 국가를 공격한 뒤 그 땅에 카라 키타이 (검은 키타이, 즉 검은 거란)라는 이름의 불교국가를 세웠다.

칭기즈칸이 출현하는 12세기말 몽골고원에서 몽골족은 몽골고원의 50여개 부족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메르키트, 오이라트, 몽골 등 투르크계와 몽골계, 중국계, 이란계까지 섞인 여러 부족이 초원 전역에서 장기적이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러한 전쟁의 원인에 대해 한랭화 혹은 건조화 같은 기후변화를 지적한 학자들도 있다. 또한 위구르 제국 붕괴 이후에 부족 집단간에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격렬한 군사적 대립도 계속되었다. 여기에 고려를 침공했다가 별 성과없이 물러선 거란(요나라), 여진(금나라)과 같은 외부세력의 견제와 개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칭기즈칸은 이들 부족들을 모두 격파하고 1206년 몽골고원을 통일하며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너희들은 타타르, 케레이트, 메르키트, 오이라트, 투르크 등, 여러 종족에 속하였으나 오늘부터는 하나의 몽골백성이다.  몽골국(Yeke Mongol Ulus, 예케 몽골울루스)은 몽골고원에 속한 여러 종족들이 가진 충성심과 군율로 다져질 것이다. 충성과 군율, 이것 만이 대몽골제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위대한 비밀이 될 것이다.” 

100만명 가까운 인구에 2000만 마리의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와 몽골민족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태동할 무렵에 몽골고원의 한 부족의 이름에 불과한 몽골족이 몽골고원의 다양한 부족들을 통칭하는 혼혈 민족의 군사공동체, 이익공동체와 같은 민족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1206년 칭기즈칸의 선포로 만들어진 확장된 개념의 몽골족은 수많은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몽골인은 우리의 사촌?

▲칭기즈칸 마동상 박물관의 ‘알랑고아 설화’ 그림, 알랑고아는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을 불러 5개의 화살을 꺾어보라 하지만 아무도 5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꺾지 못한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한 대씩 화살을 주자 자연스럽게 꺾었다. 이런 비유를 통해 형제 간의 우애와 화합을 부탁하고 알랑고아는 죽는다. 칭기즈칸은 알랑고아의 막내아들 보돈차르의 10대손이다.
▲칭기즈칸 마동상 박물관의 ‘알랑고아 설화’ 그림, 알랑고아는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을 불러 5개의 화살을 꺾어보라 하지만 아무도 5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꺾지 못한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한 대씩 화살을 주자 자연스럽게 꺾었다. 이런 비유를 통해 형제 간의 우애와 화합을 부탁하고 알랑고아는 죽는다. 칭기즈칸은 알랑고아의 막내아들 보돈차르의 10대손이다.

북방유목민족 중 유일하게 몽골족은 ‘몽골 비사’라는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남기고 있다. 이 중 무엇보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몽골족의 시조설화인 알랑고아 설화와 고구려 주몽의 건국설화가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 점이다. 코리족이 서쪽으로 이동했느냐, 남쪽으로 이동했느냐에 차이가 있지 빛으로 잉태해서 태어난다는 점과 지배세력과 갈등으로 부족에서 떨어져 나와 이동을 했다는 점등은 거의 일치한다. 이 설화를 바탕으로 칭기즈칸의 선조가 고구려의 주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한국과 중국에 있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부리야트족은 바이칼 호수 일대를 부리야트족의 발원지로 생각하는데, 이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일부에서는 부리야트족이 한국인과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민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유전적으로 동질성이 크지 않아 유전적으로는 무관하다는 게 정설이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의 부리아트족 거주지, 부리야트족은 칭기즈칸 직계로 여겨진다. 몽골 북부의 바이칼 호수 동편의 부리야트공화국에 24만의 부리야트족이 거주한다. 내몽골에도 부리야트족이 거주한다. 이들과 한민족의 유전적 유사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혹자는 부리야트족이 러시아에도 있는 것을 두고 하나의 몽골이 세 조각(몽골, 중국의 내몽골, 러시아의 부리야트족)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들 역시 근현대 러시아에 뺏겨 합병된 이후에 외몽골의 주류인 ‘할하’ 몽골족이 아니기 때문에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의 부리아트족 거주지, 부리야트족은 칭기즈칸 직계로 여겨진다. 몽골 북부의 바이칼 호수 동편의 부리야트공화국에 24만의 부리야트족이 거주한다. 내몽골에도 부리야트족이 거주한다. 이들과 한민족의 유전적 유사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혹자는 부리야트족이 러시아에도 있는 것을 두고 하나의 몽골이 세 조각(몽골, 중국의 내몽골, 러시아의 부리야트족)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들 역시 근현대 러시아에 뺏겨 합병된 이후에 외몽골의 주류인 ‘할하’ 몽골족이 아니기 때문에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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