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현지인들이 먹는 허르헉 요리에는 야채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물이 귀한 초원에서 야채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아 요즘도 몽골사람들은 마늘, 양파 정도의 야채만 즐긴다고 한다. 유목민들은 가축으로부터 쉽게 육류를 구하지만, 농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탄수화물, 섬유질을 구하기가 어려워 주로 농경민들과 교류를 통해 탄수화물과 섬유질을 얻었고, 가끔은 농경민을 약탈해서 원하는 것을 얻었다.

▲몽골의 대표 요리 허르헉, 양고기를 큼직하게 잘라 당근, 양파 등의 야채와 함께 양철통에 넣은 후 불에 달군 돌을 함께 넣어 삶아내는 요리로 특유의 향신료가 없어 담백하고 ‘깜놀’할 정도로 맛있었다.
▲몽골의 대표 요리 허르헉, 양고기를 큼직하게 잘라 당근, 양파 등의 야채와 함께 양철통에 넣은 후 불에 달군 돌을 함께 넣어 삶아내는 요리로 특유의 향신료가 없어 담백하고 ‘깜놀’할 정도로 맛있었다.

 

농경사회 한반도, 유목DNA가 다시 고개 들다

필자와 같은 586세대들의 삶을 보면, 유목DNA를 가진 농경사회였던 한반도에서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글로벌화를 거치면서 유목적 코드가 점점 강화된 세상을 살아왔다고 본다. 필자는 산업화 초기에 미군 기지촌에서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80년대 치열한 민주화 항쟁시기를 거쳤다. 이후 90년대 글로벌화, 2000년대 이후 정보화를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아마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격동과 사회변혁을 겪은 이 세대가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노마디즘과 실크로드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다. 2000년 기업 경영에 문외한인 채 처음 벤처기업을 설립한 뒤 피터 드러커, 짐 콜린스, 마이클 포터 같은 미국 경영학자 책을 수백권 읽었는데 뭔가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한국 경영환경과 미국식 경영이론들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꽤 있었다. 이후 경영학자들의 책보다는 역사책을 탐독하면서 역사의 교훈에서 기업경영의 교훈을 얻으려 하였다. 특히 필자에게는 구미나 중국의 농경민, 지배자의 역사보다는 유목민 중심의 실크로드 역사와 유목적 삶의 양식이 더 흥미진진했다. 기업환경도 유목적으로(노마딕하게) 급변하고 있었다.

역사를 공부하면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세상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고, 칭기즈칸이나 티무르 같은 역사적 인물에 나를 투영해서 그들의 의사결정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건 기업경영의 살아있는 케이스 스터디가 되었다. 그 시대환경과 문물을 공부하고 그들의 동기와 성취, 과정, 조직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회사 경영의 공부가 되었다. 역사와 기록의 승자가 된 농경민의 역사가 아니라 유목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면 세상을 새롭게 보는 관점이 생기며, 이는 틈새시장(니치마켓)을 찾아 강자들에게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우리 같은 회사에게 새로운 관점과 혜안을 줬다.

 

유목민의 역사

18세기 중엽 청나라 건륭제 시기에 멸망한 준가르제국을 최후의 유목제국이라 일컫지만, 현대의 몽골은 국가적 규모에서 유목민족의 특징을 대부분을 간직하고 있는 드문 나라다. 지금도 몽골의 전체인구는 3백만에 불과하지만 가축의 수는 6000만 마리가 넘는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인간집단의 삶과 행위의 축적이 현재의 모습을 규정한다고 할 때, 몽골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유목민들의 삶과 문화, 역사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는 침엽수로 이뤄진 대삼림 지대가 펼쳐진다. 이 시베리아 삼림을 야쿠트족 언어로 '타이가'라고 하는데, 이 삼림에는 몽골족이 '숲속의 사람들'이라고 부른 수렵, 어로, 순록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대삼림 지대의 남쪽, 북위 40~50도의 사이의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지역에는 건조한 대스텝이 가로놓여 있다. 동쪽으로는 몽골고원과 만주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흥안령산맥의 서쪽 기슭에서부터 서쪽으로 몽골리아와 준가리아 분지를 거쳐 키르키스 초원, 킵차크초원, 푸스타(puszta)라고 불리는 헝가리초원에 이르는 광활한 지대이다.

헤르도토스의 ‘역사’나 사마천의 ‘사기’ 등에 나오는 유목민에 대한 묘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이는 유목민의 삶의 방식이 지난 2000년간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유목민들은 이 광활한 벌판에서 사마천이 ‘사기, 흉노열전’에서 '수축목이전이(隨畜牧而轉移, 가축을 따라 목축하며 이동한다)’ 또는 ‘축수초천사(畜水草遷徙, 수초를 따라 이동한다)' 라고 언급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가축을 기르면서 이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농경이 벼, 밀, 보리 등 길들여진 식물을 기르는 것이라면 유목은 말, 소, 양 등의 길들여진 동물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가 유목단계에서 농업정주단계로 진화해왔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오히려 최초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시작된 농업정주문명이 더 오래된 인류의 생활 양태였다. 기원전 9000년 전까지 20~30 명 규모의 씨족 단위로 수렵채취경제에 의존하던 고대인류는 농작물을 재배하고 유순한 가축을 기르면서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선다. 고고학자들은 농업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먹는 음식의 질은 떨어졌고 개인당 노동량은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실제 수렵채취를 했던 인간들의 뼈를 분석해보면 농경민보다 덩치도 훨씬 컸고 영양상태도 좋았다는 게 확인된다. 그런데 왜 인간은 더 고생스럽고 먹을 것도 시원치 않은 농경을 시작했을까? 인간이 수렵채취를 버리고 농경을 택한 것은 식량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몽골 유목민의 텐트.
▲몽골 유목민의 텐트.

 

박찬희 작가가 쓴 몽골기행에 따르면 6만년전 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나올 때의 인구는 5만명으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9000년경에는 500만~600만으로 늘어났다. 이때 지구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며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났다. 한덩어리로 붙어있던 한국, 중국, 일본도 이때 황해가 생기면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통계학적으로 보면 한 명의 수렵채집자가 살아가기에 충분한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약 26Km²의 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10분의 1 정도의 개간된 땅이 있다면 최소한 50명이 먹고살 수 있다. 기원전 6000 내지 8000년사이에 무게가 45Kg이 넘는 표유류는 양, 염소, 소, 돼지, 말, 두 종류의 낙타, 당나귀, 야마(라마), 순록, 물소, 야크, 발리 소 등 13종이었지만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가축화가 되었다.

인간이 마을에 정착해 야생고기를 먹는 양이 줄어들면서 소금섭취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인간의 몸에는 식탁용 소금통 3,4개분량의 소금을 포함하고 있는데 땀을 통해 소금을 배출하기 때문에 배출된 소금을 계속 섭취하여야 한다. 야생동물의 고기에는 충분한 양의 소금이 있지만, 농사로 얻은 곡물이 식단에 포함되면서 소금부족 현상이 증가하였다. 인간이 기르던 가축들도 소금이 필요하고, 소의 경우에는 인간보다 10배 많은 소금을 필요로 한다. 보다 큰 마을이나 도시에서는 소금이 필수적인 상품이 되었다. 결국 소금은 최초의 국제적인 무역 상품이 되었으며, 기원전 221년 진나라에서는 최초의 국가독점 상품이 되었으며 로마도 국가가 소금을 독점하며 재정을 유지하였다.

수렵채취경제에서 벗어난 인류가 비슷한 시기에 농경과 유목이라는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그들 앞에 놓여 진 자연조건 때문이다. 다만 먼저 문명을 이루고 문자를 발명해서 사용했던 것이 농업정주문명이었기에 유목민의 존재가 늦게 전해진 것이다. 유목적 생활양식이 농업정주민의 생활보다 미개하거나 열등하다는 견해는 편견에 불과하다.

농업이 적합한 큰 강과 비옥한 토지를 낀 4대문명의 발상지는 구석기 시대부터 농업정주문명이 자리잡게 되었고, 유라시아중앙부에 걸친 대 초원지대에 살던 고대인류는 유목생활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헝가리에서 만주까지 펼쳐진 이 초원지대의 남쪽, 즉 북위 30~40도 사이는 강수량이 풍부해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했지만, 북위 40~50도 지역은 멀리 서쪽에서 편서풍이 실어오는 습기만으로 농사를 짓기에 강수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북위 40~50도 사이의 대초원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수렵채집과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유목민으로 살아야 한다.

걸어 다니며 유목을 했던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말이었다.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3500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초원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말을 길러 아기들을 위한 젖을 얻고 겨울철 식량으로도 사용하였다. 원래 말은 덩치가 작아 사람이 타기에 적합하지 않았는데 기원전 1000년전부터 사람이 탈 수 있는 덩치 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말을 타기 시작한 이후부터 헝가리 초원부터 만주까지의 북방초원은 유목민족의 고속도로가 되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에는 수렵채집자, 유목민, 농경인들과의 갈등, 정착 생활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갈등이 묘사되어 있다. 기원전 2100년전에 수메르인들이 쓴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약 6000년 이전부터 구전으로 전승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는 인간이 동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때이며 인간 역시 농업생활에 길들여지기 시작할 때이다. 이 일화는 인간이 농사를 짓기 위해 나무를 잘라내고 또 야생의 황소를 길들이면서 느꼈던 모호한 감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성경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도 수메르 문명, 바빌로니아로 전해진 이야기로 보이는데 이런 갈등이 묘사되어 있다. 에덴동산은 수렵채집 시대의 생활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사과나무는 농경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국립중앙박물관 ‘몽골 전시회, 칸의 제국’에 출품된 은제장식. 흉노시대인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주조됐다. 원래 장식용 접시 등에 붙어있다가 몽골의 말갖춤을 꾸미는 용도로 쓰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팜므 파탈’ 옴팔레 여왕이 헤라클레스를 노예로 부리면서 희롱하는 모습을 그렸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부장품이 되기까지 150여년간 먼 여정을 거친 이 은제 장식판은 초원의 길이 2000년전에도 얼마나 역동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몽골 전시회, 칸의 제국’에 출품된 은제장식. 흉노시대인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주조됐다. 원래 장식용 접시 등에 붙어있다가 몽골의 말갖춤을 꾸미는 용도로 쓰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팜므 파탈’ 옴팔레 여왕이 헤라클레스를 노예로 부리면서 희롱하는 모습을 그렸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부장품이 되기까지 150여년간 먼 여정을 거친 이 은제 장식판은 초원의 길이 2000년전에도 얼마나 역동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만주보다 한반도, 특히 한강유역에 집중한 이유도 농경을 통해 풍부한 식량 확보가 가능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주는 반농반목의 유목적인 지역인데 논 벼농사도 그나마 구한말 조선인들이 간도에서 시작했다. 고려말 공민왕때 요동을 가질 수 있던 기회를 포기했던 것도 요동이라는 별로 얻을 것도 없는 땅을 힘들여 지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환경으로 인해 거친 것은 맞지만, 그들이 결코 농업정주민들에 비해 항상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유목민들 중에서 가축을 잃어 무일푼이 된 사람은 농사를 짓게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몽골인들은 자식이 말을 안들을 때에는 '나중에 농사나 짓는 놈이 될거다' 라는 식으로 욕했을 정도로 농경민들을 경멸했다.

농경민들은 수천년간 자기들의 잣대로 유목민을 천시하고 유목민의 삶의 양식을 무시했다. 박찬희 작가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내몽골의 유목민을 강제로 한곳에 정착해 살도록 했고 정착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죽였다는 내용도 책에 실었다. 내몽골은 유목민이 정착하면서 풀이 사라지고 빠른 속도로 사막화가 진행되어 황사의 진원지로 변해 자기들의 수도인 베이징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 하늘까지 뿌옇게 오염시키고 있다. 초원은 ‘얇디 얇은 눈꺼풀’이라는 경고를 농경정주민은 알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저작권자 © KIPOST(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