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협력업체들 인력 빼내 현지에 전속 디자인하우스 설립… 업계 "국내 생태계 육성할 마음 없는 것"

삼성전자가 핵심 전속 디자인하우스를 국내가 아닌 베트남에 세운 것으로 KIPOST가 확인했다. 국내 업체를 배제하고 외국계 업체를 끌어들여 국내 생태계가 고사일로에 처했다. 

메모리는 중국의 압박과 투자 지연에 직면했고, 가뜩이나 약한 시스템 반도체 산업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한국 경제를 유일하게 떠받치고 있는 반도체 산업마저 황폐화가 우려된다. 

 

삼성전자, 국내 생태계 배제하고 반도체 인프라 없는 베트남행

최근 베트남에 엔지니어만 100여명 규모의 전속 디자인하우스 ‘에스엔에스티‘가 설립됐다. 삼성전자의 전속 디자인하우스로, 국내 어떤 디자인하우스보다 규모가 크다. 이 회사에는 국내에서만 30여명이 넘는 인력이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다. EDA 업체 시높시스는 한국에 ASIC 디자인 센터를 세우기 위해 지난 5월부터 인력 확보에 나섰다. 케이던스 또한 국내에 디자인 센터를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멘토 지멘스 비즈니스는 디자인 센터 대신 컨설팅 서비스를 강화했다. 국내 생태계를 키우는 대신 독자 생존을 택한 셈이다.

이를 주도한 것은 박재홍 부사장이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디자인서비스 팀이다. 업계는 삼성전자의 이같은 움직임이 국내 생태계를 키울 생각이 없다는 걸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협력사가 죽든 말든 스스로의 사업 확장에만 혈안이 돼있는 것”이라며 “고급 인력을 충분히 확보한 EDA 업체들이 디자인 서비스까지 지원하면 삼성 입장에서는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이라고 일갈했다.

 

TSMC와 함께 성장한 대만 시스템 반도체 업계, 꽃도 피지 못한 국내 업계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생태계(SAFE)를 조성했을 때 업계는 삼성도 TSMC, UMC처럼 전속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을 전폭적으로 육성할 것이라고 여겼다.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에서 디자인하우스는 반도체 설계 업체(팹리스)가 그린 설계도를 외주 생산업체(파운드리)가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ASIC 수요가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디자인하우스가 설계부터 후공정까지 턴키로 제공하고 있다. 전속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의 역량이 파운드리 사업의 성패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TSMC와 UMC는 디자인하우스와 함께 설계자산(IP)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지분 투자까지 해가면서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했다. IP를 공동으로 개발하면 IP 포트폴리오를 넓혀 팹리스의 선택지를 넓힐 수 있고 해당 IP를 쓸 때마다 디자인하우스에 수익이 돌아간다.  이 덕에 대만은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 TSMC와 미디어텍, 엠스타 등 조단위 시스템반도체 업체가 즐비하다. 

하지만 삼성전자 국내 전속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의 매출액은 다 합쳐봐야 TSMC의 디자인하우스인 글로벌유니칩(GUC) 1곳만 못하다. 삼성 파운드리 사업부와 비교하면 100분의1 규모다.

현재 삼성전자 전속 국내 디자인하우스는 알파홀딩스, 하나텍, 가온칩스 등 3곳이다. 알파홀딩스와 가온칩스가 12인치 물량을, 하나텍이 8인치 제품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나마 가장 큰 알파홀딩스가 전직원을 다 합쳐야 90명인데 그동안 반도체에 대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아 내년 8월 이후로는 수주를 단 한건도 받지 못했다.

 

왜 하필 베트남일까

삼성전자가 굳이 베트남을 택한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베트남은 반도체 분야에서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성장성을 봤을 가능성이 있다.  

파운드리 수요는 아시아에 쏠려있다. 경쟁 업체가 많은 중국·대만이나 인건비가 비싼 미국·일본·EU를 제외하면 남는 곳은 많지 않다. 인도는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 낙후된 유통환경, 엄격한 노동 환경 등의 문제가 남아 있다.

베트남은 인력 확보도 쉽고, 인건비도 저렴하다. 자동차, 가전 등 각 완성품(OEM) 업체의 생산 거점과 일치하거나 가까워 수요도 꾸준하다.

일본 내 자체 생산 규모를 줄이고 있는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는 직원 1000여명 규모 ‘르네사스 디자인 베트남’을 운영한다. 르네사스와 이 회사가 인수 중인 IDT만 잡아도 삼성전자 입장에선 큰 손을 고객사로 둘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수 있다. IDT는 삼성전자 무선충전 수신 칩(Rx)의 독점 공급사다.

 

인력·자본 부족? 삼성이 야기했다

삼성전자는 국내 생태계가 인력도, 자본도 부족하기 때문에 파운드리 기반을 해외에 두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국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를 무너뜨렸던 것은 다름 아닌 삼성전자다.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전력반도체(PMIC) 등 온갖 시스템 반도체를 내재화하면서 코아로직, 엠텍비전 등 중견 기업급 업체들조차 문을 닫았다. 인재들을 죄다 쓸어가는 통에 팹리스 업계는 1년 365일 인력난에 시달린다. 

실제 국내에서 시스템 반도체 설계 후반부(Back-end) 작업을 할 수 있는 레이아웃 엔지니어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각 반도체의 동작과 회로 구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경험도 충분히 갖춰야해 석사급 이상 인재를 선호하는데, 상대적으로 프론트엔드 설계보다 인기가 떨어져 전공자를 찾기 어렵다.

석박사급 인재들도 취업 1순위 목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이나 EDA 업체의 한국 지사로, 중소기업인 디자인하우스에 오려고 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은 학사급 인재나 특성화고 졸업생을 뽑으면서 인력을 채우고 있다. 엔지니어 100명을 확보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시스템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는 2000년대 후반부터 늘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가뜩이나 중소기업에는 오려고 하지 않는데 뽑아도 3~5년 후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자본도 문제다. 삼성전자는 국내 디자인하우스 몇 곳에 다른 디자인하우스 업체를 인수합병(M&A)해 규모를 키우라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국내 디자인하우스 업체들 중 그만한 자금력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없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을 분리, 확장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다 ‘SAFE’라는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을 뿐 생태계 육성을 위한 지원은 적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에게 기본 중의 기본인 제품개발키트(PDK) 교육을 제공하는 게 전부였다. 영업 또한 각자도생이었다.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다른 파운드리 업체들은 디자인하우스와 공생하는데, 현재 삼성 SAFE는 모두가 따로 노는 구조”라며 “가뜩이나 파운드리 업체와 디자인하우스 업체의 규모 차이가 큰데 파운드리 업체가 디자인하우스 업체를 키운다는 느낌이 없으니 고객사들 입장에서도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지 우려되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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