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의 야경
▲울란바토르의 야경

한국을 찾는 몽골 청년들

▲2017년 6월 하순 저녁 늦게 도착한 몽골의 관문, 칭기즈칸 공항의 외관, 칭기즈칸 공항은 울란바토르에 있는 몽골 유일의 국제공항이지만 아직은 한국의 지방 중소도시 버스 터미널 규모로 아담하다. 일본의 지원으로 훨씬 더 큰 규모의 신공항이 조만간 들어설 예정이다.
▲2017년 6월 하순 저녁 늦게 도착한 몽골의 관문, 칭기즈칸 공항의 외관, 칭기즈칸 공항은 울란바토르에 있는 몽골 유일의 국제공항이지만 아직은 한국의 지방 중소도시 버스 터미널 규모로 아담하다. 일본의 지원으로 훨씬 더 큰 규모의 신공항이 조만간 들어설 예정이다.

몽골은 살인율이 높은 나라이다. 10만명당 7건으로 우리나라 10배 정도다. 세계적으로 살인율이 낮은 나라들은 한국, 일본, 유럽 정도이며 미국의 살인율은 몽골에 육박하는 10만명당 5명 수준이다. 예전에는 1000달러만 주면 사람을 절대 찾을 수 없는 초원 어딘가에 묻어줬다는데, 요즘은 3000달러로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몽골은 초원과 사막이 넓어 한번 묻으면 다시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유쾌한 몽골인 가이드 타우가 (수요일에 태어난 보석이라는 뜻)는 한국의 법대에 재학중이며 나중에 한국에서 불법취업자들의 법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유쾌한 몽골인 가이드 타우가 (수요일에 태어난 보석이라는 뜻)는 한국의 법대에 재학중이며 나중에 한국에서 불법취업자들의 법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육식위주의 식단을 가지고 유목적 문화를 가져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시비, 폭력사건이 자주 발생한다. 장정들끼리 싸움이 붙어서 경찰이 와도 싸움이 끝날 때까지 말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특히 중국사람들을 혐오해서, 중국인에 대한 폭행사건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중국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고, 여행기간 내내 해외 어디서나 쉽게 마주치던 중국인들을 몽골 관광지에서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필자의 변호사 친구에 따르면 체류기간이 지난 몽골과 베트남 노동자들이 정치적 난민신청을 통해 체류기간을 연장하려는 송사가 늘고 있다고 한다. 우리 가이드 타우가는 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오전에만 학교를 가고, 오후에는 공장에서 일을 해 돈을 벌었다는 생활력강한 몽골 청년이다.

5년에서 10년 사이에는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본격적인 사회진출이 이루어질 것이다. 탈북민들이 5만~10만 정도 되는데, 남한사회에서 취업을 하면 각종 혜택이 사라지기 때문에 오히려 화학적인 사회적응은 잘 안 되고 있다고 한다. 탈북자,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본격적인 사회진출을 하게 되면 프랑스, 독일이 겪었던 문화적 충돌이 한국에서도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집단주의적 문화를 가져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국사회가 다문화를 포용하는 게 만만치 않은 도전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인구절벽에 놓인 한국사회의 미래는 남북화합과 이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울란바토르에 부는 아파트 붐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여름에는 35도, 40도 올라 갈만큼 한국과 비슷하게 덥고, 겨울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1월 평균기온이 영하 27도인 전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이다. 위도는 프랑스 파리와 비슷하지만 한참 북쪽의 모스크바보다 더 춥다. 몽골 북쪽 시베리아 도시인 러시아 이르쿠츠크나 노보시바르스크보다 더 춥다. 울란바토르는 해발 1350m 고지대인데다 평균해발 1500미터인 몽골고원에서는 분지에 해당해 찬공기가 내려 앉기 때문이다.

울란바토르라는 이름은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 1924년 소련이 낙후한 봉건 국가 몽골에 자본주의를 건너뛰고 사회주의로 곧장 이행할 것을 강권하며 만들어준 이름이다. 몽골판 대약진 운동이었는데, 농업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초원에서 말을 타던 유목민들은 집단 농장의 프롤레타리아로 변신하기를 강요받았다. 소련의 몽골판 ‘사회주의개조’ 운동에 저항했던 독립 영웅 수흐바토르 등은 이 시기에 숙청당했다.

▲졸업 50주년만에 형형색색 곱게 차려 입고 울란바토르 광장에 모인 몽골 중학교 동기동창들. 뒤쪽에 보이는 칭기즈칸 동상을 세울 때 몽골에서는 커다란 상징성을 가지는 채찍이 없다는 이유로 6·70대 노인들이 강하게 항의하며 시위를 했었다 한다.
▲졸업 50주년만에 형형색색 곱게 차려 입고 울란바토르 광장에 모인 몽골 중학교 동기동창들. 뒤쪽에 보이는 칭기즈칸 동상을 세울 때 몽골에서는 커다란 상징성을 가지는 채찍이 없다는 이유로 6·70대 노인들이 강하게 항의하며 시위를 했었다 한다.

위에 언급한대로 울란바토르는 분지라 여름에는 유난히 덥고 겨울에는 게르에서 떼는 석탄이 공기를 오염시킨다. 요즘 아파트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울란바토르에는 4개의 화력발전소가 있고 이 발전소에서 멀어질수록 물이 미지근 하고 아파트 가격이 싸진다고 한다.

아파트에 사는 울란바토르 사람들도 시골에 가면 자기 말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아파트 붐을 경험한 한국 기업인들이 이 지역 아파트 붐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자이슨 전승탑에서 내려 본 울란바토르 시내.
▲자이슨 전승탑에서 내려 본 울란바토르 시내.

 

몽골의 슈바이처이자 독립운동가, 이태준 선생

한국에서 이태준 선생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인터넷 검색으로 사진도 찾기 힘든데, 몽골에서는 몽골의 슈바이처라고 불릴 정도로 추앙받고 있다. 이태준 열사는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고 안창호 선생의 영향을 받아 의사로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신해혁명을 본 그는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1914년 몽골에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하려던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로 와서 병원을 개업하게 된다. 라마교 영향으로 병을 치료할 때 기도와 주문을 썼던 몽골인들에게 현대의술을 전했는데, 당시 몽골 내 감염율이 70%에 달했던 성병 치료에 탁월했다고 한다. 그는 몽골 마지막 칸의 주치의기도 했다. 몽골인들은 이태준 열사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해 그를 ‘신인’ 또는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을 대하듯 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의 자이슨 전망대와 몽골국왕 보그드 칸의 고궁사이 요지에 위치한 이태준 기념관은 대사관, 한인회, 연세대 의대동창회의 노력으로 2001년 준공되어 현재는 한몽 친선의 상징이자 단골 관광코스가 되었다.
▲울란바토르의 자이슨 전망대와 몽골국왕 보그드 칸의 고궁사이 요지에 위치한 이태준 기념관은 대사관, 한인회, 연세대 의대동창회의 노력으로 2001년 준공되어 현재는 한몽 친선의 상징이자 단골 관광코스가 되었다.

1921년 이태준 열사는 모스크바에서 온 자금 4만 루블을 상하이까지 운반하고, 운전기사였던 헝가리 폭탄 전문가 마자르를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에게 소개하는 두 가지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당시 몽골을 점령한 러시아 백위파 운게르 남작을 일본인 장교들이 부추겨 그의 부하들이 이태준 열사를 교살한다. 이준열 열사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마자르의 존재를 숨겼고, 마자르는 이태준 열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열단장 김원봉을 찾아가 프랑스 조계의 비밀 폭탄제조소에서 성공적으로 폭탄을 제조했다. 마자르는 영화 ‘밀정’에 나왔듯이 의열단 대일공작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여운형은 1921년 가을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가던 길에 이 근처에 있던 이태준 선생의 묘에 들러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야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라고 이태준을 애도했다. 안락한 의사의 삶을 박차고 독립투쟁을 위해서 초원의 땅 몽골까지 와서 37세의 나이에 백 러시아 군대에 잔인하게 피살된 젊은 청년은 지금도 몽골과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몽골인의 술 사랑

테를지 국립공원 가는 길에 들른 슈퍼마켓에서 우리 8명의 일행은 게르에서 먹을 칭기즈칸 보드카와 안주를 잔뜩 샀다. 이 술은 병당 만원으로 몽골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이다. 몽골의 특산물 마유주(아이락)는 망아지를 낳은 이후에 나오는 젖으로 만드는데, 8월부터 시장에 나와서 6월 말에 몽골을 방문한 우리 일행은 아쉽게 몽골 특산주인 마유주를 즐기지 못했다.

울란바토르에서 구매한 술.
▲테를지 국립공원에 가면서 구매한 술.

몽골사람들이 워낙 술을 좋아해 몽골정부는 술을 판매하지 못하는 날을 정하고 있다. 매달 1일은 슈퍼마켓, 술집 등 어떤 곳에서도 술을 판매하지 못한다. 필자 일행이 몽골을 방문한 시기에 대통령 선거일이 겹치자 몽골정부가 술 판매를 금지시켜 이틀 동안 술을 살 수가 없었다. 칭기즈칸 호텔 옆의 이마트도 술 판매 매장을 아예 닫아버렸다.

몽골인들의 음주문화는 700~800년전 몽골제국 당시에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세계제국인 몽골의 조정회의는 가칸(칸중의 칸, 황제)이하 참여한 대신들이 전원 만취해서 기절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지금도 몽골에 비즈니스로 방문을 하면 술을 엄청 먹인다. 손님으로 방문하면 술을 만취할 만큼 마셔 주는 게 예의라고 하는데, 힘들면 만취한 척이라도 해야 한다.

울란바토르의 길거리에서 대낮에도 만취한 사람을 보는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몽골인들의 위장에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별로 없어 쉽게 술에 취한다. 사고도 많이 쳐서, 몽골의 전체 범죄 중 80%가 술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몽골의 평균수명이 65세에 불과한 것도 보드카를 많이 마시고 고기를 많이 먹어서 라고 한다.

몽골은 1990년 민주화 이후에도 구소련을 추종해왔던 세력인 몽골인민혁명당에 권력이 집중돼 왔다. 2008년 총선에서 선거부정 의혹으로 울란바토르에서 야당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며 폭력사태가 발생해 5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에 몽골정부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연립내각을 수립한 일이 있었다. 2017년 6월 대통령 선거 결과에 반발하는 폭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몽골 정부가 술판매를 금지한 덕택에 필자 일행은 첫날 슈퍼마켓에서 조달한 칭기즈칸 보드카와 한국에서 공수해온 소주로 4박6일 일정을 버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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