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디스플레이 업계서 일본의 몸값이 다시 치솟고 있다. 샤프⋅소니⋅파나소닉 등 과거 디스플레이 패널 시장을 주름잡던 회사들을 뜻하는 게 아니다. 증착⋅노광장비와 섀도마스크 등 디스플레이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될 설비⋅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다시 시장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LCD에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생산 체제로 이행 중인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는 아직 중요 고비때마다 일본 업체들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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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디스플레이 파주 LCD 공장 내부. (사진=LG디스플레이)


최근 디스플레이 업계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장비 업체는 일본 니콘이다. 소비자들에게 카메라 업체로 알려진 니콘을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떠받드는 이유는 이 회사가 생산하는 노광장비 때문이다.“니콘 없인 10.5세대 투자도 없다”

 

노광장비는 LCD 및 OLED 생산에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LCD⋅OLED 패널 후면에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박막트랜지스터(TFT)가 들어가는데, 이 TFT를 만들 때 노광장비를 이용해 미세한 배선을 그린다.

문제는 디스플레이용 노광장비를 일본 니콘과 캐논만 만들 수 있고, 업계 화두인 10.5세대(2740mm X 3370mm)급 장비는 오직 니콘만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니콘이 1년에 만들 수 있는 노광장비 양은 10.5세대 LCD 원장 월 9만장 투자에 투입할 수 있을 규모에 불과하다. 이는 가장 먼저 10.5세대 라인 투자를 천명한 중국 BOE 혼자 쓰기도 부족하다. 만약 같은 규모의 10.5세대 OLED 라인을 꾸린다면 니콘이 1년반 생산하는 노광장비를 모두 구매해야 한다.

궈타이밍 혼하이정밀 회장.(사진=혼하이정밀)

현재 세계적으로 10.5세대 패널 라인에 투자하기로 한 회사는 LG디스플레이와 중국 BOE⋅차이나스타옵토일렉트로닉스(CSOT)⋅HKC⋅CEC-판다, 대만 혼하이정밀(폭스콘) 등이다. 니콘이 대대적인 장비 증산을 하더라도, 이 모든 업체가 10.5세대 라인에 동시 투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달 초 중국 광저우에서 10.5세대 LCD 공장 착공식을 가졌던 혼하이정밀은 궈타이밍 회장이 노광장비 구매를 위해 일본까지 직접 다녀가기도 했다. BOE⋅CSOT⋅LG디스플레이는 10세대급 노광장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나, 혼하이정밀은 아직 니콘으로부터 확답을 듣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신두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기판 사이즈가 넓어지면 노광 빔이나 회로 패턴의 균일성(Uniformity)를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며 “안타깝게도 노광장비의 핵심인 광원⋅렌즈에 대한 기술이 국내에는 축적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OLED 증착장비는 아직 수급 불균형

이 같은 일은 정확히 1년 전에도 벌어졌다. 애플이 2017년부터 OLED 아이폰을 출시키로 하자 삼성디스플레이가 가장 먼저 찾아간 회사는 일본 캐논도키다. 캐논 자회사인 캐논도키는 OLED 생산 핵심 공정 장비인 증착기를 만드는 회사다.

LG디스플레이 역시 캐논도키를 찾아갔지만 “앞으로 1년 반 동안은 줄 수 없다”는 답만 듣고 돌아 왔다. 캐논도키가 생산하는 증착기 물량 대부분을 삼성디스플레이가, 나머지 일부마저 중국 BOE가 선(先)주문 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LG디스플레이의 구미 E5 라인에는 캐논도키가 아닌 국내 업체의 증착기가 도입됐다. 6세대(1500mm X 1850mm) OLED 증착라인에 국내 업체 장비가 사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향후 LG디스플레이가 불량률을 얼마나 극복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E5는 오는 3분기 양산에 들어간다.

삼성디스플레이가 생산한 플렉서블 디스플레이.(사진=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는 올해 2~3분기에 처음으로 캐논도키에서 6세대 OLED 증착장비를 도입한다. 이 장비는 파주 E6 공장에 설치되는데, 가동은 빨라야 올 연말쯤으로 예상된다. 캐논도키 장비 선점 여부가 디스플레이 업체 양산 일정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다.

LG디스플레이, 섀도마스크 어떻게 수급할까

증착장비와 함께 OLED 공정에 반드시 들어가는 섀도마스크 역시 일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품목이다. 섀도마스크는 OLED 각 화소의 정확한 위치에 유기물이 증착될 수 있게 해 주는 부품이다. 예컨대 섀도마스크 품질이 떨어지면 적색을 내야할 위치에 녹색이나 청색 유기물이 섞일 수 있다. 이 경우 패널 전체가 불량 판정을 받는다.

현재 OLED용 섀도마스크는 일본 다이니폰프린팅(DNP)과 도판프린팅 두 회사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특히 최신 6세대 공정에는 DNP만 섀도마스크를 양산 공급해봤다. 그러나 DNP는 삼성디스플레이와의 관계가 워낙 끈끈하고, 삼성디스플레이의 섀도마스크 사용량이 크게 늘면서 타 업체에 이를 공급해 주기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LG디스플레이가 섀도마스크 수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관건이다. 현재로서는 도판프린팅이 E5 라인에 섀도마스크를 양산 공급할 가능성이 높고, 일부 국내 업체도 테스트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섀도마스크를 이용한 증착공정 모식도. 검은색 부분이 섀도마스크다. (자료=선익시스템)

업계 관계자는 “연간 OLED용 섀도마스크 시장은 3000억원 안팎에 불과하지만 수조원에 이르는 OLED 시장 전체의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부품이 됐다”고 말했다.

디스플레이, 넓게는 IT 제조업 전반의 대(對) 일본 의존 현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삼성⋅LG 전자계열사를 주축으로 한 국내 전자산업이 원천기술 보다는 공정기술을 중심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일본은 원천기술을 가진 수 많은 강소기업들이 전방산업을 떠받치는 구조다. 산업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는 변곡점마다 일본 업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한 전자 업계 원로는 “국내 전자산업은 전방산업인 세트부터 시작해 부품을 거쳐 소재 분야로 고도화되는 과정에 있다”며 “원천기술에 발을 딛고 발전해 온 일본과는 아직 격차가 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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