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위로 떠오른 반도체·디스플레이 화학물질 유해성 문제

삼성전자가 직업병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했다. 지난 2007년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던 황유미 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무려 11년 8개월만이다.

이를 끝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라인은 지금 이 순간도 돌아가고 있다. 이제야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라인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의 인체 유해성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사과는 했지만 인정은 못한다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 대표는 지난 23일 서울 세종대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 합의 협약식'에서 “병으로 고통 받은 직원들과 가족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이날 협약식에서 삼성전자는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 발생한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가 내놓은 중재안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했다. 피해 보상은 내달부터 2028년까지 진행된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의 인체 유해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 측은 이날 오후 기자와의 통화에서 “생산 라인에서 나오는 화학 물질과 질병·질환 사이의 상관관계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사과로 사회 분위기는 생산 공정에서 나오는 화학 물질이 인체에 해롭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반올림 측은 삼성전자의 사과에 대해 “다른 계열사와 해외 사업장에서도 직업병 피해를 보상해야한다”며 “정부와 국회는 산업안전보건법을 강화해 노동자 건강권을 보장하며, 산재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을 철저히 조사·처벌해야한다”고 전했다.

 

삼성전자는 왜 사과를 했을까

 

삼성전자의 사과 뒤에는 정부와 법원이 있었다.

한참간 조용했던 삼성 직업병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올해 2월이다. 피해자들이 산업재해 신청에 필요하다며 삼성전자 작업환경 측정 보고서 공개에 대한 고용노동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대전고등법원은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전까지 기업의 영업 비밀을 공개할 수 없다며 거부해온 고용노동부는 작업환경 측정 보고서를 적극 공개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가뜩이나 중국의 메모리 시장 진입을 우려해오던 업계는 이같은 결정이 한국이 우위에 있는 최첨단 기술을 정부가 나서서 공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던 4월, 삼성 옴부즈만 위원회는 삼성전자 생산 라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자료 부족으로 삼성전자의 작업 환경과 백혈병 발병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인과관계가 없는 게 아니라, 입증할 정도의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옴부즈만 위원회는 삼성전자에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모든 화학 물질 리스트를 공개하라고 권고했다. 반도체·LCD 사업장 재직자와 퇴직자, 보상대상자의 공유집단(코호트)을 만들고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연계해 작업환경에서의 유해인자 노출과 질병 발생, 사망 위험 간 관련성을 장기 추적할 것도 제안했다.

자료 공개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산업재해 소송에서 법원이 피해자 쪽에 선 판결도 다수 나왔다.

작년 8월 대법원은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근무한 근로자에게 발병한 다발성 경화증이 업무 과정과 인과 관계가 없다는 원심 판결을 파기했다. (대법원 2017. 8. 29. 선고, 2015두3867 판결 참고)

유해물질에 상시 노출된 노동자에게 현대 의학으로 발병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희귀 질환이 발생하면 둘 사이의 인과 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역학 조사 또한 피해가 발생한 당시의 근무 환경에서 진행되지 않는데다 화학 물질 등 주요 자료를 사업주가 공개하지 않아 신뢰성이 없다고 설명했다.

 

▲산업재해 현황.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지난해 업무상 질병자, 사망자 수 등 산업 재해 피해자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e-나라지표
▲산업재해 현황.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지난해 업무상 질병자, 사망자 수 등 산업 재해 피해자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e-나라지표

그러자 산재 인정에 인색했던 당국도 입장을 바꿨다. 근로복지공단은 4월 삼성전자 온양공장 품질보증(QA) 부서에서 일하던 근로자의 ‘비호지킨 림프종’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8월에는 고용부가 첨단 산업 종사자의 산업재해와 관련한 역학 조사를 생략하고 이전 업무 관련성이 인정된 사례가 있거나 비슷한 공정에서 일한 종사자에게 발생한 질병을 산재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달 서울행정법원은 삼성전기 수원사업장 백혈병 피해자 김 모 씨가 제기한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김 씨의 손을 들어줬다. 삼성전기 백혈병 피해자 사례를 처음으로 인정한 판례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도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1990년 이후 28년만의 전부 개정이다. 개정안에는 법의 보호 대상을 ‘근로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확대하고 산업 재해 예방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사업주의 의무 위반으로 근로자가 사망하는 경우 현행 7년 이하의 징역을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높이고, 사업주에 선고되는 벌금형도 현행 1억 원 이하에서 10억 원 이하로 상향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도 바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사업장 내 안전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양사는 5년 전부터 신공장을 세울 때 인체 유해성 가스가 오가는 배관으로 고가의 실린더 배관을 채택하고 있다. 비싼 가격 탓에 이전까지는 쓰지 않았지만, 2013년 삼성전자 화성 사업장 불소 누출 사고 이후 안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변화가 있었다고 업계 관계자는 전했다.

 

▲삼성전자의 화학물질 통합 모니터링 시스템. 중앙 방재 모니터링 센터에서 화학물질 중앙공급장치(CCSS) 등을 총괄 제어한다./삼성전자
▲삼성전자의 화학물질 통합 모니터링 시스템. 중앙 방재 모니터링 센터에서 화학물질 중앙공급장치(CCSS) 등을 총괄 제어한다./삼성전자

삼성전자는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11개의 잠재적 유해물질을 ‘금지’ 물질과 ‘제한’ 물질로 구분해 ‘제한’ 물질만 일정 조건 아래 쓸 수 있도록 했다. 화학 물질은 각 사업장에서 구매 전 사전 평가를 실시, 규제 물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중 유해성이 높은 화학 물질은 △대체물질 개발 △농도 저감 △사용 중지의 3단계 관리 체계를 수립했다. 실제 대체 물질을 적용한 사례도 있다고 삼성전자는 설명했다.

이와 함께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적용 범위를 협력사로 확대했다. 삼성전자 협력사는 반드시 화학물질 보관 용기 라벨 부착, 누출 대비 여유 용기 설치, 작업장 안전보건자료(MSDS) 제공 등 유해물질 취급자 대상 보호 프로그램을 운영해야한다.

SK하이닉스는 앞서 지난 2015년 산업보건검증위원회가 제안한 127개의 개선 과제 중 106개를 완료했다. 지난해 노사 대표가 참여한 ‘산업보건 선진화 지속위원회’를 설립, 나머지 과제를 포함한 전 과제를 지속 모니터링할 수 있게 했다.

사업장 및 협력사의 투명한 안전 사고 보고를 위해 사고관리시스템을 마련, 각 사업장에서 발생한 모든 사고를 등록해 관련 부서에서 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이행하도록 했다.

올해 고유해성 화학물질 취급 부서를 대상으로 저감활동을 펼치고 중장기적으로는 이를 대체 물질로 바꿀 계획이다.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투명한 정보 공개 또한 중장기 목표다.

가스 및 화학물질 공급사, 외부 세정 협력사는 협력사 등록 접수 시 현장 실사를 포함, ‘SHE(Safety·Health·Environment) 적합성 평가’를 통과해야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올해부터는 협력사 대상 컨설팅 프로그램도 마련, 추진 중이다.

반도체 소재 업계 관계자는 “관련 소재·부품·장비를 개선하고 있는 것만 봐도 화학물질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나오는 미립자(fume)를 줄여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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